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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에게서 배우는 삶의 지혜

홍성표 2013. 5. 9. 16:26

 

 

 

집으로 가는 골목길에서 갑작스럽게 코끝을 스치며 온몸으로 관능적인 향기가 퍼진다. 추억을 부르는 그 향기에 취해 주변을 둘러보니 옆집 담장 안에 라일락꽃이 만발했다. 알싸한 충격에 새삼스럽게 이곳저곳을 찬찬히 살펴보니 곳곳마다 봄꽃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꽃샘추위가 아직 가시지 않아 인간들이 몸을 움츠리고 있는 사이 이미 세상은 ‘봄꽃나라’가 되어 있다.

화려한 자태를 자랑하던 요염한 봄의 스타 벚꽃이 지기 시작하자, 나름대로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유채꽃, 철쭉꽃, 모란 등이 다투어 피고, 작고 이름 없는 야생 풀꽃들마저 용기를 낸다. 크건 작건, 화사하건 소박하건, 꽃들은 각기 자신의 방법으로 치장하고 벌과 나비를 유혹한다. 바야흐로 식물들의 은밀한 연애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봄이 아름다운 것은 꽃들의 사랑이 대지에 충만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꽃들은 시도 때도 없는 인간과는 달리 일 년에 한 번만 번식기를 가진다. 봄이야말로 꽃들이 짝을 찾는 최대의 ‘연애시장’이 열리는 시기이다. 간혹 다른 계절을 택해 희소가치라는 전술로 자신을 과시하는 축도 있지만, 대부분은 짝을 찾기에 용이한 큰 장을 선호한다. 그리고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말처럼 열흘 남짓한 기간 동안 최고의 단장을 하고 선택되기를 기다린다.

말은 하지 않아도 그들의 경쟁은 치열하다. 그렇다고 옆의 친구를 해치지는 않는다. 마타도어와 흑색선전이 난무하는 세상에 그들의 경쟁은 순진하기 짝이 없다. 설령 남들보다 경쟁력이 떨어져 선택되지 못 해도 낯을 찡그리는 법이 없다. 가슴은 찢어질지라도 아픔을 드러내지 않고 미소를 머금는다. 그저 자신이 가진 모든 능력을 동원해 경쟁하다가 능력이 모자라면 조용히 시들뿐이다.

경쟁에서 뒤처진다고 좌절하거나 목숨을 끊는 일은 더욱 없다. 그들은 조용히 다음 해를 기약한다. 비록 궁벽한 처지에 있을지라도 더 좋은 꽃을 피울 준비를 하고, 열심히 잎을 피운다. 꽃나무는 비바람이 몰아쳐 꺾이고 잘릴지언정 스스로 자신을 죽이지 않는다. 봄이 되면 검은 고목에도 여전히 싱싱하고 여린 꽃을 피운다. 주변에 어린 자식 같은 나무들이 즐비해도 꽃나무는 은퇴를 모른다.

사랑을 경쟁하는 것은 유명 브랜드의 꽃들만이 아니다. 산에 가면 이름 없는 우리 야생화가 지천으로 피어 있다. 언젠가 생태학자의 글에서 자식에게 나무 이름, 꽃 이름을 이야기 해주지 못하는 부끄러움이 도시인의 비극이라는 충고를 들은 적이 있다. 최재천이 주문처럼 되뇌고 다니는 “알면 사랑한다”라는 말을 이 봄에는 실천하고 싶어진다. 얼레지, 노루귀, 금괭이눈, 홀아비바람꽃 등등 생소한 이름이 많다.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야생화의 경쟁력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강하다. 짓밟히고 보아주는 이 없어도 끈질기게 살아남아 온 산야를 뒤덮는다. 나름대로 생존 방식을 지니고 자기만의 특색 있는 꽃들을 피운다. 요즘 야생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찾는 사람이 많아지는 현상을 보며 강소기업의 원리를 배운다. 이번 주말에는 가까운 야산이나 공원에라도 나가 이름 모를 야생화를 찾아보며 은퇴 이후의 삶을 돌아볼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