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연이 아닌 정신적 유전자를 남기자
인식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세기에 한 번 일어날까 말까 한 사건이다. 찰스 다윈의 <진화론>,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하이젠베르크의 <양자역학> 등은 세상을 바꾼 혁명적 이론이었다. 이런 천재들의 도움으로 우리는 세상을 보는 눈을 새롭게 뜨고, 불가해한 자연현상을 이해하게 되었다. 20세기 후반에 등장한 유전자 이론도 그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1976년에 출간된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는 다윈에 머물러 있던 인식에 충격을 주었다. 물론 ‘진화론’에 기반을 둔 저작이었지만, 진화론의 ‘자연선택론’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모든 생명현상의 바탕에는 유전자의 자기 보전 논리가 자리하고 있음을 밝혔다. 그 이후에 벌어진 종교와의 논쟁이나 생물학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볼 때 그 주장도 충분히 세상을 바꿀 만한 혁명적인 이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이론은 ‘생물학결정론’이라는 큰 논란을 일으켰다. 인종차별, 남성 우월주의, 성차별에 관한 과학적 근거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많은 논란 가운데서도 인간의 행동을 생물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회생물학’이라는 새로운 장을 열었다. 그러나 사실 도킨스는 과학자가 아니라 과학을 ‘저술하는’ 작가(writer)였을 뿐이다. 그가 작가적 재능을 발휘할 수 있게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과학자가 바로 에드워드 윌슨 하버드대 교수이다. 그가 바로 ‘통섭’을 외치는 최재천 교수의 스승이다.
그의 ‘친족 선택론(kin selection)’은 이미 생물학계의 주류 이론이 되었는데, ‘피붙이인 형제(유전적으로 가까운 개체)를 위해 희생하는 건 당연하다’는 이론이다. 요컨대 혈연으로 연결된 개체들은 구성원의 번식을 위해 서로 협력한다는 것이다. 이 이론을 바탕으로 그동안 여러 가지 사회현상들이 설명되었다. 이를테면 남성의 바람기도 유전자를 퍼뜨리기 위한 본능적 행동으로 합리화되고, 부모들의 맹목적 자식 사랑도 생물학적으로 용인되었다. 유전자는 본디 이기적이므로 어쩔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윌슨은 몇 년 전부터 자신이 줄곧 지지해온 이론을 스스로 뒤엎기 시작했다. 초기에 이기적 유전자 이론의 핵심인 ‘유전자 중심의 포괄적응도 이론(inclusive fitness theory)’을 강조했던 걸 후회하기까지 했다. 그는 “친족 선택론에 맞지 않는 사례들이 계속 나왔기 때문”이라며 오히려 결론은 ‘집단 선택’, 즉 같은 종 안에서도 ‘이타적’인 집단이 생존에 유리하다는 것이다. 이기적인 혈연이 아닌, 집단 내에서 협동성이나 공감과 같은 형질들도 유전될 수 있고, 집단 간에 생존경쟁이 있을 경우 협동하는 집단이 살아남는 데 더 유리하다는 것이다.
사실 ‘이기적 유전자 이론’은 그동안 우리가 모르고 있던 인간 행동양식의 많은 부분을 밝혀준 공이 크지만, 반면에 인간의 삶이 지닌 초월적 고결성을 상당 부분을 누추하게 훼손했으며 어떤 측면에서는 해석이 불가능한 부분도 많았다. 전쟁에 나가 국가를 위해 목숨을 버리거나 일본의 한 전철역에서 생판 모르는 일본인을 구하고 대신 죽은 이수현 씨의 행동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은 꼭 혈연이 아니더라도 집단을 위해 자기를 희생할 수 있으며, 아무 대가 없이 남을 도울 수 있으며, 재산을 자식이 아닌 사회에 기부할 수 있다. 이는 어쩌면 인간에게는 생물학적 유전자 이외에도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유전자가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굳이 말하자면 ‘이름’이라고 하는 정신적 유전자가 우리 마음속에 있다는 것이다. 아니 이름을 남기지는 못해도 나의 ‘행위’를 기억해 주리라는 ‘믿음’이 정신적 유전자로 자리하고 있으리라는 것이다.
많은 은퇴자들이 자식들에게 맹목적인 ‘퍼주기’로 자신의 삶을 곤경에 빠뜨리고 있다. 그러한 행동도 어쩌면 생물학적 진리일 수 있다. 마치 알을 낳은 뒤 자신의 몸을 자식의 양분으로 내어주는 거미처럼. 그러나 또 다른 생물학적인 진리도 있다. 혈연적 유전자가 아닌 정신적 유전자를 남기는 방법이다. 남은 생을 어떻게 사용하여 미래에도 살아남을 정신적 유전자를 남길 수 있을지 이제라도 고민해 보아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