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이란 참으로 오묘한 것이다. 손에 잡힐 듯하면서도 그 실체를 알 수가 없다. 어느 때는 감동적으로 느껴졌던 맛이 한 순간에 입맛이 떨어지는 ‘도루묵’이 되기도 한다. 단언컨대 맛은 혀끝에서 느끼는 것이 아니라 기억 속에서 느껴지는 것이다. 그래서 맛은 감각적이면서 동시에 관념적이다.
기억 속에 저장된 관념의 맛은 숙성되고 발효하기도 한다. 대개 맛의 바탕은 어릴 적에 형성되는데, 당시에는 그 맛의 실체를 알지 못하다가 오랜 세월 기억의 항아리 속에서 숙성되고 발효되어 비로소 간절하고 안타까운 맛으로 재탄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그 맛은 현실 속에 재현하기가 어렵다.
우리가 어렸던 시절은 온통 가난하고 물자가 부족하던 궁핍의 시대였다. 그러니 음식이라고 온전했을 리 없다. 주로 채소는 집 주변에 심어 자급자족하다시피 했고, 육 고기나 생선은 특별한 날에나 먹는 특식이었다. 오죽했으면 도시락에 가끔 들어 있던 달걀 프라이가 어린 날의 행복했던 순간으로 남아 있을까.
그 시절 무청의 줄기를 잘라 돼지 뼈와 함께 고아서 반찬으로 먹었던 이름 모를 음식이 아직도 머리에 남아 있다. 나이 든 이후로 다시는 그 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으나 기억 속에서 숙성되어 어느새 감칠맛으로 변해 있다. 그러나 그 음식이 현실 속에 나타나는 순간 기억 속의 맛은 무참히 짓밟힐 것이 틀림없다.
맛은 그래서 개인적이고 이기적이다. 모든 이는 개인적인 추억의 맛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주관적인 맛을 모두 만족시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시대가 변해 외식이 하나의 대세로 자리 잡으면서 우리는 서로의 주관적인 맛을 양보하고 타협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전국 어디를 가나 음식점의 맛이 비슷한 것은 이런 연유가 아닐까?
그런 까닭으로 나는 시중에 범람하는 음식 관련 안내 서적들을 믿지 않는 편이다. 나와 추억을 공유하지 않은 사람의 입맛을 어찌 신뢰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어느 날 도서관에 들렀다가 서가에서 황석영의 <맛있는 세상>을 발견한 순간 잠시 멈칫했다. 젊은 날의 추억과 함께 그가 음식 관련 책을 냈다는 의외성 때문이었다.
그러나 책을 펼치는 순간 그는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는 음식이 아닌 인생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음식으로 풀어놓은 자서전이라고나 할까? 동시대인으로서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파란만장한 삶의 궤적 속에 만났던 가지각색의 음식들이 때로는 순수하게 때로는 질펀하게 펼쳐져 있었다.
다 알다시피 그는 격랑 속의 인물이다. 만주에서 태어났고 6.25 와중에 부산으로 대구로 피난살이를 했으며, 군에 가서는 월남 파병을 경험했다. 5.18 시절에는 광주의 중심에 있었고 북한을 방문했다가 긴 세월 망명객으로 외국을 떠돌더니 귀국 후 감옥살이를 했다. 어떤 이는 “황석영이 가는 곳은 따라가지 마라”는 농담을 할 정도다.
그러니 그가 들추어내는 기억 속의 맛은 필연적으로 깊은 사연들을 품고 있을 수밖에 없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서사적인 음식’이라고나 할까. 어쩌면 그의 기억 속의 음식들은 그만이 좋아하는 매우 주관적인 음식일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 그가 경험했던 음식들은 가난 속에서 진화해온 것이므로 우리 음식의 원형질을 간직하고 있다.
그가 기억해내는 음식들은 사실 음식이라고 할 수 없는 것들도 많다. 장떡이나 언 감자 요리는 물론 군대 시절 철모에 삶아 먹은 닭 두 마리라든가 심지어는 감방에서 ‘소지’가 만들어 준 눈물 고인 김치부침개까지 남에게는 권할 수 없는 매우 주관적인 가치가 녹아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에게 동의하는 것은 그의 음식관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맛을 잃어버렸다. 맛있는 음식에는 노동의 땀과 나누어 먹는 즐거움의 활기, 오래 살던 땅, 죽을 때까지 언제나 함께 사는 식구, 낯설고 이질적인 것과의 화해와 만남, 사랑하는 사람과 보낸 며칠,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궁핍과 모자람이라는 조건이 들어 있으며, 그것이 맛의 기억을 최상으로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미식가나 식도락가를 ‘맛을 잃어버린 사람’으로 규정한다. 마치 진정한 사랑을 찾아 끝없이 헤매는 돈 주앙처럼 말이다. 진정한 사랑은 다양한 레시피로 가득한 음식의 기교가 아니라 가난한 연인들의 보리밥에 고추장을 넣은 거친 음식일망정 무엇보다 향기로운 참기름 한 방울의 추억에 있는 것이 아닐까?
황석영과의 추억은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학 시절 신문의 연재물을 취재하기 위하여 그를 만난 것은 70년대 초반 그의 수유리 시절이었다. 취재 후 몇 번 더 그의 집을 오가며 친분을 쌓았지만, 그의 파란만장한 삶을 쫓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지금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그의 집에서 먹었던 맛있는 굴비의 추억뿐이다.
'실버스토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있다 (0) | 2013.11.29 |
---|---|
바야흐로 문자(文字) 전성시대 (0) | 2013.11.25 |
지혜로운 자는 마지막에 말한다 (0) | 2013.11.12 |
가을, 북한산 단풍 속을 거닐다 (0) | 2013.11.12 |
고(故) 김열규 선생의 노년 예찬 (0) | 2013.10.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