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과 소백의 산자락이 만나는 지점에 봉황이 알을 품은 형상의 봉황산이 있다. 영주로 가는 내내 중국에서 날아오는 미세먼지의 영향인지 날이 흐리고 시야가 갑갑하다. 그 동안은 봄의 황사만 걱정하면 되었는데 이제는 사시사철 타클라마칸의 중금속 모래뿐만 아니라 베이징의 자동차 매연까지 마셔야 하니 갈수록 불결한 이웃의 존재가 얄궂다. 과연 동남풍을 부르는 한국의 제갈량은 없는가!
겨울의 초입이라 풀은 말라가고 낙엽이 뒹군다. 부석사를 찾아 오르는 길 양 옆에 늘어선 은행나무가 이미 앙상하다. 바람에 날리는 이파리 사이로 아직 고약한 냄새의 흔적은 남아 있지만, 그래도 기개는 남아 가지들이 가지런히 하늘을 찌르고 서있다. 생각보다 크기가 작아 겸손한 당간지주는 불자들이 오르는데 방해가 될까 봐 슬며시 옆으로 비켜 서있다.

우선 일주문은 ‘태백산부석사’라는 표현을 택했다. 태백산 자락임을 과시하는 뜻이리라. 봉황산도 산세는 작으나 명당임이 분명한데 역시 큰 것을 좋아하는 인간의 속됨이 이름에서 나타난다. 문을 통과하면 일단 하계(下界)는 벗어난다. 중계를 지나 안양루에 오르면 거기부터는 상계 즉 극락세계가 펼쳐진다. 그래서 그런지 계단이 가파르다. 무릎이 안 좋은 이들은 옆으로 우회하기를 권한다.
교과서에서 익히 들어온 최초의 목조 건물이라는 무량수전을 오래도록 궁금해 왔으면서 이제야 찾게 되니 참으로 게으른 인생이다. 최순우가 ‘배흘림기둥’이라고 극찬한 목조 기둥이 저녁 기운을 받아 은은한 금빛으로 빛난다. 아쉽게도 기도 시간이라 동쪽으로 돌아 앉아 있다는 아미타불은 친견하지 못했다. 대신 무량수전 옆에 천년을 앉아 있는 문제의 ‘부석’을 오래도록 감상했다.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년)에 의상(義湘)대사가 창건한 절이다. 곳곳에 의상이 지었다는 절은 많지만, 이 절이 의상이 지은 최초의 절이며 이 절처럼 의상의 개인사가 담긴 절은 없다. 우선 절 이름에 ‘부석’이라는 명칭을 쓴다는 것이 이채롭지 않은가? ‘부석’에 깃든 설화가 그만큼 진실성을 얻는다는 방증이며, 의상에게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는 증거이다. 그 속에 선묘(善妙)가 있다.
우리 역사 속에 원효와 의상은 중국의 이백과 두보, 서양의 베토벤과 모차르트처럼 한 시대를 풍미한 영웅이며 맞수였다.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는 이야기에서 두 사람의 성향과 캐릭터는 갈라진다. 항구 인근의 토굴에서 해골 물을 마시고 통 큰 원효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외치며 고향으로 돌아오고 ‘범생과’인 의상은 기어이 당나라 유학을 관철한다.
원효는 경주로 돌아와 일약 스타가 된다. 해골 물이 효험이 있었는지 그의 파격적인 설법은 장안의 화제가 되었으며 평범한 가문 출신이지만, 요석공주와 야합해 설총을 낳는다. 여덟 살 아래인 의상은 이런 원효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명문가 출신임에도 당나라 청도에서 미천한 하숙집 딸인 선묘와 러브라인을 연출한 것을 보면 그런 짐작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선묘의 사랑은 의상의 고리타분 앞에서 좌절하고 죽어 용이 되어 의상을 돕기로 한다. 귀국한 의상이 소백산 자락에 절을 지으려 할 때 산적들이 발호하자 선묘가 용이 되어 나타나 바위를 공중에 띄워 도적을 혼비백산하게 하여 이 절을 부석사로 이름 짓게 된다. 진실로 용이 나타나고 바위가 붕붕 떠다녔겠는가마는 의상의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는 선묘에 대한 미안함과 연모의 마음이 이런 설화를 남겼을 것이다.
아무튼 원효가 장터에서 화엄을 온몸으로 밀고나가고 있을 때 의상은 절에 앉아 화엄의 이치를 후학들에게 전파하고 있었다. 원효가 감성적 인물이라면 의상은 이성적 인물이었다. 원효가 실천적이라면 의상은 관념적이었다. 원효가 대중적이라면 의상은 정치적이었다. 그러나 이 둘은 화엄에서 하나가 되었다. 갈가리 찢어진 나라를 하나로 회통(會通)하려던 ‘화쟁(和諍)’의 정신은 오늘 우리에게도 꼭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다가 날이 저물어 내려와야만 했다. 돌아서서 내려다보는 태백과 소백의 연봉이 물결처럼 출렁이고 그 위에 안양루가 공중에 떠있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돌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떠있는 느낌이다. 마치 곧 날아갈 듯 긴장한 모습으로 서 있는 품이 봉황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산세와 잘 어울린다.
위에서 내려다본 계단도 일직선이 아니고 조금씩 비틀려 있다. 건물 배치에도 화엄을 생각하는 의상의 정신이 배어 있는가? 그래서 그런지 수직적 구도임에도 위압감을 주지 않는다. 오래된 누각은 단청조차 벗겨져 마치 연륜 높은 여배우의 화장 안 한 민낯을 보는 듯했으나 그 모습이 우아하기 이를 데 없다. 주변에 최근 증축한 화려한 건물들이 오히려 민망하다.
일설에는 부석 밑으로 줄을 통과해 보니 실제로 공중에 떠 있더라는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가 있는데, 아직도 떠 있다는 '부석의 전설'을 믿고 싶어 하는 민중의 마음에는 선묘에 대한 애틋한 정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은 아닐까? 역시 눈에 보이는 건물은 언젠가 소멸하겠지만, 영원히 남는 것은 사랑뿐이라고 생각하며 일주문을 나섰다.

그리운 부석사
- 정호승
- 정호승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비로자나불이 손가락에 매달려 앉아있겠느냐
기다리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아미타불이 모가지를 베어서 삼겠느냐
새벽이 지나도록
마지(摩旨)를 올리는 쇠종 소리는 울리지 않는데
나는 부석사 당간지주 앞에 평생을 앉아
그대에게 밥 한 그릇 올리지 못하고
눈물 속에 절 하나 지었다 부수네
하늘 나는 돌 위에 절 하나 짓네
오죽하면 비로자나불이 손가락에 매달려 앉아있겠느냐
기다리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아미타불이 모가지를 베어서 삼겠느냐
새벽이 지나도록
마지(摩旨)를 올리는 쇠종 소리는 울리지 않는데
나는 부석사 당간지주 앞에 평생을 앉아
그대에게 밥 한 그릇 올리지 못하고
눈물 속에 절 하나 지었다 부수네
하늘 나는 돌 위에 절 하나 짓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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