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의 발명은 인류사의 위대한 일이었다. 어린 시절 언제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새 학년에 세계사 과목이 포함되면 지리부도가 따라 나왔다. 밤새 세계지도를 펴놓고 지명과 함께 상상의 나래를 폈던 기억이 새롭다. 물론 그때의 상상이 후에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본 것과는 전혀 달라 어처구니없기도 했지만, 즐거웠던 추억을 훼손할 정도는 아니었다.
인류사 초기에도 필요에 따라 지도를 만들었겠으나 대개 부정확할 뿐 아니라 주관적 왜곡이 심했다. 자기가 아는 곳은 크게, 잘 모르는 곳을 작게 흐지부지 그려 넣었다. 그 시대의 지도는 동시대인의 세계관을 반영한다. 목적이나 필요가 지도를 왜곡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식민지를 목표로 한 ‘대항해시대’의 지도가 그렇다.
지도가 비교적 정확해지면서 근대가 시작하고, 인공위성을 통한 정밀한 지도가 제작되면서 비로소 현대가 펼쳐졌다. 오늘날의 세계 곳곳을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하는 기술의 진보가 세계의 글로벌화를 앞당겼다는데 이론이 없다. 그 인공위성 기술의 발달이 지금의 내비게이션 문화를 만들었다.
내비게이션은 참으로 편리하다. 길치에 가까운 나도 내비게이션의 도움으로 어느 곳이든 찾아간다. 요즘은 스마트폰에 내장하여 걸어서 찾아갈 때도 요긴하게 사용한다. 기술발전이 인간의 삶을 갈수록 편리하게 해주니 ‘기술 유토피아’를 꿈꿀 만하다. 그러나 기술 만능의 이면에 어두운 구석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한 번은 내비게이션의 고장으로 공포에 떨었던 기억이 있다. 모르는 곳을 찾아가던 중이었는데 갑자기 내비게이션 화면이 꺼지자 온 세상이 어두워지는 듯한 두려움이 몰려왔다. 옛날에는 이정표만 보고도 찾아다녔는데 마치 바보가 된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엄마 잃은 아이 같이 당황했었던 기억이다.
물론 찾아갈 곳의 지리를 미리 알고, 최단 거리의 코스 정보를 확보하면 편리하고 좋은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어쩌면 그 정보의 친절함에 속아 우리가 새로운 길을 발견할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 번 고민해 볼 일이다. 모두 시간에 쫒기며 ‘효용성’이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인생의 많은 부분을 놓치고 사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라는 이야기다.
교육에서 내비게이션과 비슷한 개념이 선행학습이다. 말하자면 교육에도 ‘효용성’의 개념이 침투하여 남을 앞서려면 남보다 먼저 길안내를 받고, 앞서서 미래에 배울 내용의 정보를 캐내자는 것이다. 사교육에서는 이 선행학습보다 더 좋은 미끼가 없다. 어떤 학부모가 자식이 남에게 뒤처지는 상황을 이겨낼 수 있을까? 이른바 ‘공포의 상술’이다.
교육이 자신의 능력에 맞는 소질을 개발하고 인격의 완성을 목표로 하는 것일진대, 남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만을 목표로 만들어버린 우리나라의 교육제도는 그래서 사악하다. 박근혜 정부가 내건 선행학습 폐지라는 정책목표는 아마도 이미 공고하게 아성을 구축한 사교육 시장을 이기기 어려울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달콤해 보이는 선행학습이 사실은 아이들을 망치고 있다는 교육적 진실이다. 이해하기 어려운 학습 내용을 억지로 머리에 주입하는 것은 그렇다 치고, 오직 정답으로 가는 한 가지 길만을 배우는 아이들의 상상력은 얼마나 퇴보할 것이며, 새로운 해법을 찾아보려는 아이들의 모험심은 싹도 틔워보지 못하고 무참히 짓밟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내비게이션이 꺼지는 순간에 느꼈던 공포가 인생에서 나타난다면 어떻겠는가? 선행학습에 익숙한 젊은이가 사회에 첫발을 내디디며 느끼는 공포에 대해 부모가 어디까지 책임질 수 있을까? 어떤 부모가 직장 상사에게까지 찾아가 자식을 부탁하는 웃지 못 할 해프닝이 벌어지는 것도 가까이서 보면 희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나라의 비극이다.
그런데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온 고령화 사회를 대비한 내비게이션은 아직 개발되지 않았는가? 지금까지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백세 시대에 맞춘 내비게이션 앱은 또 어디에 없는가? 아쉽지만 아무데서도 출시된 바가 없는 모양이다. 그런 점에서 은퇴자들의 앞에 놓인 긴 시간은 공포일 수 있다.
다행히도 베이비붐 세대 이상의 시니어들은 내비게이션이 없던 시대를 살아냈다. 그러니 스스로 지도를 만들며 행군할 수밖에 없다. ‘가지 않은 길’을 찾아가는 모험도 선행학습 세대를 위해 시니어들이 당당하게 앞서서 감수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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