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버스토리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홍성표 2013. 4. 19. 14:59

 

 

5년 전쯤인가, 이런 특이한 제목의 영화가 나왔을 때 무슨 사회복지용 멜로드라마인가 하는 정도로 생각하고 넘어갔는데 이듬해 아카데미 4개 부문을 수상하며 그 해 최고의 영화로 등극할 줄은 몰랐다. 젊은 시절에는 매 주 한 편씩 영화를 봐야만 직성이 풀리는 영화 마니아였었지만, 나이가 들고 보니 초대권이나 오면 모를까 영화를 찾아다니며 볼 정도의 열정은 사라졌는지 알지 못하는 사이에 흐지부지 세월이 지나가고 말았다.

오랫동안 그 야릇한 제목이 머릿속에서만 맴돌았었는데 최근에야 인터넷을 통해 그 영화를 만나게 되었다. 아, 그러나 그 영화는 불행하게도 잔혹 무비한 현대판 서부활극이었다. 진득한 인내심으로 보고나니 어쩐지 흥미 위주의 할리우드 오락 영화와는 매우 다른 우울한 철학이 배어 있는 느낌이었다. 주인공이 악당에게 승리하는 호쾌한 라스트 액션 같은 관습적 장면은 물론 없고, 도대체 관객을 위한 배려가 전혀 없이 끝이라는 느낌도 주지 않은 채 끝나 버리고 만다. 그러나 이러한 불친절이 때론 흥미를 유발한다.

이 영화는 미국의 작가 코맥 매카시의 작품을 영화화한 것으로, 유명한 작가주의 감독인 조엘 코엔과 에단 코엔 형제의 작품이다. 그들은 이미 ‘파고’ 같은 작품을 통해 범상치 않은 주제 의식을 보여 준 바 있다. 요상한 제목은 아일랜드 시인 예이츠의 ‘비잔티움으로의 항해’에 나오는 구절로, 시적 화자인 노인이 “늙지 않는 지성의 기념비”를 무시하는 젊은이들을 개탄하면서 젊은이들의 나라를 떠나 성스러운 도시 비잔티움으로 향한다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영화의 내용과 제목이 도대체 무슨 관계란 말인가? 피투성이 살인극 속에 무슨 심오한 철학이 숨어 있단 말인가? 굳이 성의 있게 분석한다면 목숨과 인륜을 소중히 여겼던 과거와 달리 오직 돈과 생존만을 위해 마치 동전 던지기 하듯 가볍게 목숨을 빼앗는 세상이 오늘날의 현실을 과격하게 풍자한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세상은 노인들의 지혜를 계승하는 현명한 진화가 아니라, 갈수록 폭력과 힘을 숭상하는 젊은 야수의 나라가 되어 가고 있다는 문제의식일 듯싶다.

악당을 좇던 주인공인 보안관이 아버지에 관한 꿈 이야기를 하는 마지막 에피소드에서도 이러한 주제 의식이 보다 구체화되어 나타난다. 늙은 주인공의 아버지가 스무 살이나 젊은 나이로 꿈속에 등장하지만, 그 젊은 아버지는 오늘날과 다른 가치관을 환기시킬 뿐 아니라 늙은 주인공을 지키고 보호해 준다. 젊은 아버지가 어둡고 추운 곳에서 불을 밝히는 것은 무법적이고 폭력적인 젊은이의 나라에서 작은 희망의 빛을 상징하는 것이리라. 영화 내내 배경음악도 없이 거친 숨소리로 일관한 것도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가혹성을 생생히 드러내려는 시도일 것이다.

물론 영화는 종합예술이므로, 주제 이외에도 수많은 영화적 장점들이 이 영화를 높이 평가받게 만드는 이유이겠지만, 우리 같은 시니어들의 눈에는 무엇보다 절묘한 제목이 마음을 울리는 것도 사실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현실이 바로 이 제목과 기가 막히게도 일치하지 않는가? 갈수록 살벌해질 기나긴 노년의 삶을 생각해 볼 때 총과 칼만 들지 않았을 뿐, 더 무서운 폭력적 현실일 수도 있다.

아쉽지만 장유유서와 노인 공경의 조선 시대도 가고, 가부장적 질서가 살아 있던 근대화 시기도 먼 과거가 되어 버린 지 오래다. 그러나 이 세상이 버릇없고 무관심한 젊은이들에게도 그리 좋은 세상은 아닌 것 같다. 그들도 역시 어둡고 추운 팍팍한 현실 속에서 뚜렷한 가치관도 없이 피투성이 싸움을 싸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오히려 꿈속의 아버지처럼 그들에게 위안이 되고 삶의 지표가 되어 주는 것이 이 세상을 구원하는 길이 아닌가 싶다.

앞으로도 우리에게 ‘노인을 위한 나라’는 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나라를 위한 노인’이 되는 것은 어떤가. 비록 얼어 죽을지언정 바른 가치를 지키고 다음 세대를 위해 작은 모닥불을 피우는 ‘늙지 않는 지성의 기념비’로 남는 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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