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버스토리

우리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

홍성표 2013. 5. 22. 16:49

 

 

한때 우리 사회에 웰빙(well-being) 바람이 크게 분 적이 있다. 당시 유행을 타고 곳곳에 웰빙이라는 단어를 붙여 프리미엄급 제품임을 강조했다. 그 덕에 제품의 질이 좋아졌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값이 올랐다는 점이다. 그래서 웰빙이 시대적인 요청이었는지 기업의 마케팅 수단이었는지 조금 아리송하다. 그런데 요즘에는 웰다잉(well-dying)이라는 말이 유행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건 또 무슨 마케팅일까? 이젠 죽음까지 팔 작정인가?

일반적으로 유행이란 맹목적이므로 위험하다. 그러나 유행도 처음에는 시대적 필요에 의해 탄생한다. 다만 대중들 사이로 퍼지면서 왜곡될 따름이다. 웰빙과 웰다잉도 그런 면에서 오해의 소지가 있다. 단어의 유사성과 개념이 근사하게 대립되는 듯해 많은 이들이 비슷한 뜻이나 혹은 웰빙을 재치 있게 뒤집어 놓은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두 개념은 전혀 다르며 모두가 시대적 필연성을 배경으로 태어났다.

우선 웰빙은 소득이 늘면서 삶의 질을 높이고자 하는 시대적 요청과 함께 시작되었다. 대체로 국민소득이 일만 불을 넘어가는 시점부터 이러한 욕구가 나타난다. 아마도 지금 베이비붐 세대가 왕성한 경제활동을 하던 무렵부터 웰빙 바람이 불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러니까 웰빙의 개념은 소득의 향상됨에 따라 오로지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방법론’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웰다잉은 개념이 전혀 다르다. 죽음을 바라보며 어떻게 아름답게 삶을 마감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일종의 반성적 ‘존재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웰다잉은 철학적이며 관조적이다. 이 역시 갑자기 평균 수명은 늘어나고 정신없이 일에만 몰두하다가 조기 은퇴가 눈앞에 닥치자 인생의 허망함을 느끼게 된 베이비붐 세대에 의해 주도되는 유행이 아닐까 싶다.

죽음이란 생명활동이 정지되고 존재가 사라진다는 점에서 모든 생물에 공통되고 공평한 자연의 이치다. 그러므로 잘 죽고 못 죽고의 차이가 있을 수 없다. 죽음은 죽음일 따름이다. 그런데도 웰다잉이 주목받는 이유는 죽음에도 질의 차이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 고통 속에서 의미 없는 삶을 유지하다가 남은 가족의 경제력을 모두 소진하고 떠나는 죽음보다 고통 없이 빨리 삶을 마감하는 것이 더 좋은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 주변에 연명치료를 거부하는 유서를 미리 작성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는 웰다잉의 가장 기초적인 유형이다.

 

인간이 죽음에 대해 가치평가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과 죽은 이후의 평가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만이 가진 특질로 단순한 생물학적 죽음에 의미를 부여해 숭고하게 죽고 싶은 욕구의 발로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죽음을 맞으려면 죽기 전까지의 삶을 관리해야 하므로 결국 웰다잉이 아니라 웰다잉을 위한 웰빙이 되는 셈이다.

누구나 죽음을 예측할 수 없으므로 웰다잉을 준비하기가 쉽지 않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라는 버나드 쇼의 묘비명처럼 죽음을 관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병에 걸려 죽음을 예감하는 경우에는 삶을 관리하는 것이 가능하다. 물론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고 분노 속에 살다가 생을 마감하는 사람도 있지만, 고통에 의연하게 대처하며 남은 삶을 아름답게 가꾸어가는 분들이 주변에 많다.

인생 후반기를 살아가는 시니어들에게는 노후의 삶을 꾸리는 일도 힘에 겹겠지만,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에도 대비해야 한다. 삶의 질을 높인다는 명분으로 몸에 좋다는 것은 다 찾아다니는 물질적인 웰빙에만 몰두할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삶의 마무리를 위한 ‘정신적’인 웰빙에도 관심을 두어야 하지 않을까? 결국 어떻게 웰다잉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어떻게 정신적으로 가치 있는 웰빙의 삶을 살 것인가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