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 김열규 교수의 근작인 <노년의 즐거움>이라는 책을 읽고 있는 도중 선생의 부음을 들었다. 향년 81세. 최근까지도 집필에 열심일 정도로 건강했는데 한 달 전 병원에서 혈액암 진단을 받고 항암 치료를 받다가 경남 고성 자택에서 생을 마감했다.
선생은 우리나라에 한국학이라는 분야를 개척하고 뿌리내리게 한 분이다. 신화와 문학을 넘나들며 ‘한국인이란 누구인가’라는 수수께끼를 푸는데 평생을 바쳤다. 어쩌면 오늘날 ‘한류’가 세계를 휩쓸고 있는 것도 한국문화의 특수성을 세계문화의 보편성 속에 자리매김한 선생의 공이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29세부터 서강대에서 교수 생활을 시작 했지만, 늘 꿈꾸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자연주의 삶을 실행하기 위해 정년을 6년 앞두고 돌연 교수직을 내던지고 고향인 고성으로 낙향하여 노년의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세 가지 빛살로 눈부신 노년, 그 새로운 시작에 부쳐서’라는 책의 머리말처럼 그의 노년은 새로운 삶의 흥분으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황홀할 수가 없다. 그렇기에 황혼은 황홀이다. 너무도 아름답다. 마음에 사무치게 곱고 야무지다. 우리 인생의 황혼도 황홀할 수 있다. 그래야 한다.”
책의 시작부터 들뜬 어린아이 같이 높은 목소리다. 그가 즐기는 삶의 목록을 보면 책 읽기, 걷기, 군것질하기, 차 끓이기, 차 마시기, 멍 하니 바다 보기, 눈 감고 명상하기, 고개 숙이고 상상하기 등이다. 얼핏 신기할 것 없는 일상들이지만, 생각해 보니 번잡한 삶 속에서는 꿈도 못 꿀 신나는 생활이 아닌가?
그러한 노년의 삶에 대한 긍정과 애착을 담아 펴낸 책이 바로 <노년의 즐거움>이다. 그의 ‘즐거움’은 노년의 쓸쓸함을 위로하거나 감추기 위한 관념적인 수사가 아니라 실제 살아가면서 느끼고 깨닫는 진솔한 감정이어서 매우 건강하다.
‘행복한 노년을 위한 5금(禁)과 5권(勸)’ 같은 내용도 특별히 기발한 내용은 없지만, 자신의 생활 속 체험에서 우러나온 권고이어서 그런지 일반 계몽서를 읽을 때 느끼는 갑갑함이나 반발심보다는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공감의 살가움이 있다. 노년을 앞둔 이들이 읽어 둘만 하다.
먼저 5금을 보면, 첫째 잔소리와 군소리를 삼가라. 둘째 노하지 마라. 셋째 기죽는 소리는 하지 마라. 넷째 노탐을 부리지 마라. 다섯째 어제를 돌아보지 마라 등이다. 모두 평범하지만, 오래 삭은 묵은지처럼 음미할수록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충고들이다.
5권은 다음과 같다. 첫째 유유자적, 큰 강물이 흐르듯 차분하라. 둘째 달관, 두루두루 관대하라. 셋째 소식, 소탈한 식사가 천하의 맛이다. 넷째 사색, 머리와 가슴으로 세상의 이치를 헤아려라. 다섯째 운동, 자주 많이 움직여라 등이다. 할 수 있는 일이 어찌 이것뿐이겠는가. 하지만 이 정도만 해도 늙는 것이 두렵지는 않을 것이다.
대부분 위인의 초상은 노년의 얼굴이다. 인생의 중장년기가 아무리 화려했어도 그것만으로는 모자란다. 노년의 완숙이 있어야 인생은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노년의 삶이 중요하다.
“저무는 노을은 취하도록 해맑다. 서두르지 않고 고즈넉하다. 그래서 아침노을과는 다르다. 저녁노을은 잔잔하고 차분하다. 고요하고 넉넉하다. 안존하고 평화롭기가 이를 데 없다. 그건 노년의 가장 바람직한 마음 자세와 꼭 같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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