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어가면서 사람에 대한 판단이 갈수록 어려워짐을 느낀다. 젊어서 통 크고 시원시원하며 리더십도 있던 친구가 은퇴 후 성격이 꼬장꼬장하게 바뀌어, 만나면 고약한 뒷맛만 남긴다. 반면에 평소 인색하여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받던 인간이 어느 날 엄청난 거액을 자선 단체에 기부하여 우리를 놀라게 한다.
또한, 평소에 몰랐던 숨겨진 면모가 드러나 놀라움을 주기도 한다. 늘 털털한 모습만 보여 그게 그의 전체 모습인 줄만 알았는데 놀랍게도 집의 가계부를 관장하고 있었다든가, 논리적으로 빈틈이 없어 자신을 완벽하게 방어하곤 하던 친구가 어느 날 어처구니없는 말에 속아 사기를 당하기도 한다.
예전에 나온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주인공이 변심한 여인에게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하며 애절하게 말하던데, 사랑도 변할 뿐 아니라 성격도 변하고 인간은 본디 변하는 존재가 아닌가 생각될 정도이다. 아니 변한다기보다는 애초에 그런 다양한 면모를 모두 지니고 있었다고 말하는 게 맞을지 모른다.
오래 전에 ‘책읽기의 고통’이 무엇인지 절실하게 맛보았던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 떠오른다. 너무 길기도 하거니와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하도 여럿이고 어려워 따로 적어놓고 대조해가며 읽었던 기억이 있다. 작가가 작품을 탈고한지 일 년 후에 탈진하여 죽었으니 목숨과 바꾼 작품인 셈이다.

이 소설에는 아버지 표도르 카라마조프와 세 아들 드미트리, 이반, 알렉세이 그리고 서자인 스메르자코프가 등장한다. 아버지를 제외한 네 아들은 모두 판이하면서도 뚜렷한 성격의 차이를 보인다. 그런데 그 성격들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다양한 성격의 전형이라는 점이 재미있다.
큰아들 드미트리는 작가가 좋아한 러시아 전형의 사내다. 분출하는 욕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명예와 사랑을 위해 결투를 마다하지 않는 순수성도 가진 인물이다. 둘째 이반은 고뇌하는 지식인의 전형이다. 그는 무신론자이며 합리주의자다. 그는 신도 불멸도 믿지 않기에 도덕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셋째인 알렉세이는 작가가 가장 아름답게 그려낸 인물이다. 그는 수도원에서 수행하며 신심이 깊고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한 영성을 대표한다. 사생아인 스메르자코프는 아버지와 백치 여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간질을 앓는다. 묵묵한 머슴처럼 보이지만, 아버지에 대한 뿌리 깊은 미움과 분노를 지닌 인물이다.
사건은 어느 날 아버지가 살해되면서 시작한다. 그러니까 거슬러 올라가면 고대 그리스 비극인 <오이디푸스>에 연결되는 ‘아버지 살해’ 모티프다. 사회학적으로 보면 러시아의 타락한 구체제에 대한 저항과 혁명으로 풀이할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인간에 대한 근원적 통찰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자신의 내면에 가지고 있는 뿌리 깊은 악마적 속성에 대한 부정이라는 말이다. 처음에 들었던 의문은 네 아들에 대해서는 상세한 인물 묘사와 심리 묘사가 차고 넘치는데 비해 아버지에 대한 언급은 매우 간략하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이해했다. 네 아들이 모두 아버지의 분신임을. 그리고 네 아들이 모두 살인자임을.
결국, 주인공은 다른 누구도 아닌 아버지였다. 네 아들은 아버지의 내면에 있는 다양한 속성이며 성격일 뿐이다. 이런 점이 도스토예프스키가 ‘인간 영혼의 바닥을 들여다본 사람’이라는 찬사를 받는 이유일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내면에 이런 다양한 속성을 지닌 존재라는 직관이 눈부시다.
오늘날 뇌 과학의 발전으로 이런 인간의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존재 구조가 과학적으로도 밝혀지고 있다. 인간의 뇌는 진화할 때마다 새롭게 리폼(re-form)하는 것이 아니라 원시 시대인 파충류 시절부터의 뇌가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중층적으로 쌓여 진화했으므로 다양한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인간을 바라보는 시각을 수정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코끼리 더듬기처럼 한 면만을 보거나, 처음 형성된 선입견에 얽매여 고정관념을 가지면 낭패하기 쉽다. 나이 들어 고집을 부려도 그는 원래 남을 배려했던 착한 인물이었으며, 은퇴 후 의기소침해 보여도 원래 그는 진취적이고 용기 있던 인물이었음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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