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리더십이라고 하면 보통 성격이 활달하고 앞에서 무리를 이끌고 가는 호쾌한 이미지를 연상한다. 그렇다 보니 대다수의 소심(小心)한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은 리더의 자리를 아예 올려다보지 못할 나무로 간주하고 지레 움츠러든다. 이런 선입관이 형성된 까닭은 무엇일까? 어쩌면 선천적이라기보다는 학습된 관념일지도 모른다.
어렸을 적에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통칭 IQ로 부르는 지능검사와 함께 적성검사라는 것을 한다. ‘나’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처음으로 객관적인 평가를 받으며 마음을 졸였던 기억이 있다. 검사 결과가 통보되는 날에는 마치 홍해가 갈라지듯이 반 아이들이 두 편으로 나뉜다. 검사관의 펜 끝이 바로 모세의 지팡이인 셈이다.
여러 가지 평가 항목 중에 대부분 아이들이 가장 관심을 가지는 판결은 외향적이냐 내성적이냐 하는 평가였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일이지만, 당시에 외향적으로 진단된 녀석들은 으스대며 무슨 훈장처럼 뻐기고 내성적으로 판정된 사내아이들은 불알이라도 떨어진 양 시무룩한 표정들이었다. 그리고 이 장난 같은 판정이 평생을 간다.
필자도 내성적인 성격이라고 ‘낙인’ 찍혀 늘 그런 줄만 알고 살아왔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어린 시절에 당한 최초의 사기라는 의혹이 있다. 살면서 닥치는 상황마다 내면에 여러 가지 모습들이 드러나고 자기 계발을 통해 성격이 바뀌기도 하는 것인데 몇 가지 안 되는 설문 조사로 어린 마음에 상처를 받은 것이 억울하다는 말이다.
게다가 선생님들마저 외향적인 성격을 리더의 자질이 있는 것처럼 아이들에게 은밀히 주입하는 바람에 성격이 껄렁껄렁하고 자기주장이 강한 아이들이 반의 주도권을 잡도록 부추겼다. 그런 인식이 머릿속에 뿌리 깊이 박혀 잘못된 리더상이 형성됐을 뿐 아니라 한국 남성의 ‘마초기질’이 만들어진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한편으로 20세기 산업화 시대의 한국에서는 급속한 성장의 바람을 타고 돌격형의 리더들이 득세하기도 했다. 군사문화가 지배하던 시절이었기에 이런 리더십이 큰 저항 없이 받아들여지기도 했을 것이다. 대표적 인물이 정주영 회장이다. 공사 현장에서 흔히 군대용어로 정 회장에게 ‘쪼인트’를 까이지 않은 이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거친 ‘사나이’들의 시대가 우리나라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산업화, 도시화가 휩쓸던 20세기는 이런 편견이 보편화된 시대였다. 미국의 베스트셀러 <콰이어트(Quiet)>를 저술한 수전 케인에 따르면 미국도 20세기는 ‘외향성 이상(理想)주의’를 떠받드는 사회였으며 내향성은 2류로 취급되던 시기라고 평가했다.
급격한 산업화, 도시화가 근대의 ‘인격의 문화(culture of character)’를 20세기의 특징인 ‘성격의 문화(culture of personality)’로 바꾸어 놓았다. 과거 ‘인격의 문화’에서 이상적인 자아는 진지하고 자제력 있고 명예로운 사람이었다. ‘대중에 주는 인상’모다 ‘홀로 있을 때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중요한 가치였다.
하지만 급속히 진행된 산업화가 수많은 낯선 대중들 틈에서 자신을 증명하면서 살아야 했기에 ‘성격의 문화’가 뿌리내리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사람들이 ‘타인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매력과 카리스마나 외향성 같은 자질이 갑자기 중요해졌다는 것이다. ‘한 성격 하는 사람’이 리더로 각광받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21세기로 들어서면서 이런 흐름이 바뀌고 있단다. 다시 ‘인격의 문화’가 되살아난다는 진단이다. 그 흐름의 중심에는 실리콘밸리가 있다. IT 기업의 특징이 연구하고 심사숙고하는 스타일이라 내향적인 인물들이 성공 스토리를 써내면서 내향성이라는 자질이 리더로서 그리 나쁜 것이 아님을 증명했다는 것이다.
사실 많은 성공에 묻혀서 그렇지 성공만큼이나 많은 실패를 만들어낸 것도 외향적인 리더들의 과오였다. 2008년의 금융위기도 속을 들여다보면 위기에도 눈을 질끈 감고 내지르는 외향적 리더들의 실패에 다름 아니다. 반면에 삼성의 이건희 회장은 내성적 스타일로 드러내거나 나서지는 않지만, 좀처럼 위기에서 흔들리지 않는다.
경기가 침체했을 때 활력을 불어넣는, 카리스마가 넘치는 외향적 리더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지만, 아무래도 21세기에는 고객의 감정을 섬세하게 다룰 줄 알고 직원들을 사려 깊게 배려할 줄 아는 내향적 리더십이 더 중요해졌다. 경영의 구루(guru) 짐 콜린스 식으로 말하면 “회사를 바꾸는 데 거인은 필요하지 않다.”
서번트 리더십(servant leadership)을 강조하면서 갈수록 ‘겸손하고, 소박하고, 말이 적고, 수줍음을 타고, 품위 있고, 온화한’ 내성적 리더를 요구하고 있다. 이제 평소에 자신이 수줍음이 많고 소심한 성격이라 나서지 못하던 분들에게도 기회는 왔다. 만약 집에서만 힘을 내던 분들은 먼저 아내에게 지휘권을 넘기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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