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버스토리

한국에서 리더로 살아남기

홍성표 2014. 2. 21. 08:00

 

 

서점마다 리더십에 관한 책들이 넘쳐나고 있다. 대학들도 경쟁적으로 리더십 과정을 개설하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에서 진정한 리더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말들을 한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도처에 물이 넘치는데 정작 마실 물이 없는 이 ‘풍요 속의 빈곤’ 현상이 우리 사회의 특질을 반영하는 것은 아닐까?
 
과거 경제적으로 어렵던 시절에는 그래도 국민들로부터 존경받는 리더들이 적지 않았었는데, 산업화되고 점점 부유해지면서 사회 지도층은 있으되 존경받는 리더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오죽하면 고위공직자가 되고 싶은 사람은 많지만, 인사청문회를 통과할 사람이 없어 몇 달씩 인사가 미뤄지고 있는 형편이다.
 
압축 성장 과정에서 오염된 물결에 휩쓸려 자신을 지키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세태를 고려하더라도 이런 현상은 분명히 정상이 아니다. 국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 대통령에 당선된 리더도 퇴임 이후에는 거의 예외 없이 갈가리 찢기고 만다. 어쩌면 우리 사회에 ‘영웅 만들기’를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문화가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일각에서 미국우월주의를 드러낸다고 비판하지만, 한편으로 ‘미국적 영웅관’을 잘 보여주고 있다. 미국에서는 나라를 이끄는 힘이 권력자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회 곳곳에 포진한 이런 작은 영웅들로부터 비롯한다고 본다. 그래서 국가적인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곳곳에 작은 영웅들이 탄생한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역사가 짧고 이민으로 형성된 국가라 취약한 정체성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방식이라고 분석하는 이들도 있지만, 비록 작은 성취를 이룬 사람들을 이런 저런 이유로 깎아내리기보다 본받을 점을 존중하는 그들의 태도가 한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데 훨씬 바람직하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혹자는 좁은 한반도에 부족한 자원을 함께 공유하다보니 경쟁이 심해져 생기는 현상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오히려 경제적으로 궁핍했던 시절에 존경받던 리더가 많았던 사실을 설명할 길이 없다. 결국, 우리의 내면에 알게 모르게 앞서가거나 뛰어난 사람을 끌어내리려는 심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조선 중기 정치를 떠나 지리산에 은거하던 대학자 남명(南冥) 조식(曹植)의 <우음(偶吟)>이라는 시가 있다. 시의 내용은 이렇다. ‘사람들 바른 선비 아끼는 것이, 범 가죽 좋아함과 비슷하구나. 살았을 제는 못 죽여 안달하다가, 죽은 뒤에 비로소 칭찬을 하네.’ (人之愛正士, 好虎皮相似, 生前欲殺之, 死後方稱美)
 
어쩌면 이 시가 우리나라에서 리더들의 운명을 콕 집어 표현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니 오싹한 느낌이 든다. 최근 이 정부 출범과 함께 초대 미래창조과학부 장관에 내정되었다가 온갖 험한 여론에 시달리던 중 청문회도 포기하고 미국으로 돌아간 김종훈 씨가 결국 우리나라 국적을 상실했다는 보도가 눈길을 끌었다.
 
김 씨가 미국인이었다면 그들 기준으로 영웅의 범주에 들어간다. 갖은 고생 끝에 맨손으로 창업하여 큰돈을 벌었으니 본받을 만하다. 그러나 그의 부 축적 과정이 이미 다 밝혀져서 책잡힐 이유가 전혀 없는데도 우리나라에서는 돈이 많다는 사실만으로 온갖 비난이 쏟아졌다. 그러니 미칠 노릇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조식의 탄식처럼 죽어야만 영웅이 되고 리더로 남을 수 있다는 말인가? 하긴 우리 역사에도 성삼문, 조광조, 이순신, 안중근 등 많은 영웅들이 죽음으로써 완성되었으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이 사회를 위해 리더가 필요한 것인데 죽어서야 진정한 리더가 된다면 그야말로 자가당착이 아닌가?
 
그러나 우리 역사에도 갖은 비난과 고초를 무릅쓰고 살아남아 영웅적 리더가 된 이들도 적지 않다. 신숙주가 그렇고 모진 모욕 속에서도 병자호란의 화친을 주도한 최명길이 그렇다. 정약용은 가족이 죽어나가는 아픔과 배교(背敎)의 수치를 감내하면서도 살아남아 엄청난 저작을 남기면서 영웅이 되었다.
 
그러니 이 땅에서 리더가 되기로 작정했다면 우선 웬만한 비방이나 모욕쯤은 참아내는 용기가 필요하다. 살아남아야 일도 하고 업적도 남기지 않겠는가? 만일 김종훈 씨가 우리나라를 위해 꼭 하고 싶은 일이 있고, 그 일이 가치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한국 땅에 남았어야 했다.
 
요즘 리더는 왕조 시대처럼 거창한 영웅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각기 자신의 분야에서 발자취를 남길 정도면 충분하다. 다만 뒤가 구리지 않게 자기를 관리하면서 명확한 비전을 사회나 집단에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작은 일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굵은 동아줄 같은 심지(心志)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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