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버스토리

정치 언어가 부리는 마술

홍성표 2014. 2. 19. 08:14

 

 

 

최근 박근혜 대통령이 새해 기자회견에서 언급한 “한마디로 통일은 대박이다.”라는 말이 만만치 않은 기세로 여론을 달구고 있다. 기자회견이 있은 후 인터넷 미디어를 제외한 대부분의 언론이 통일에 관한 내용을 특집으로 다루고 있으며, 많은 연구소와 대학가에서도 통일과 관련한 세미나와 포럼이 한창이다.
 
돌아가는 국내외 정세의 호흡이 과거와는 다르게 통일이 다가오고 있다는 기미가 느껴졌던 점도 있었겠지만, 그동안 북한과의 경색 국면에서 그나마 대화의 문이 언제나 열릴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던 국내 언론이 이렇게 갑자기 돌변한 데는 분명히 대통령의 언명(言明)이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정치는 본질적으로 ‘언어의 예술’이다. 아마도 경제나 생산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정치만큼 무가치하고 하잘것없는 것도 드물 것이다. 매일 하는 일 없이 놀다가 생각나면 싸움질이나 벌이는 우리 국회의 실상을 보면 더욱 그렇다. 그런데도 그나마 정치가 대신 싸워주지 않는다면 이 사회가 온전할 리 없다.
 
대의(代議) 민주주의 하에서 수많은 국민들의 갈등을 대변하려니 ‘대리 싸움’이 정치가들의 주된 기능이라 해도 할 말은 없다. 그러나 국민들이 내뿜는 탁한 감정의 쓰레기들을 국회의사당에 모아 종말처리하려면 정화(淨化) 기능이 있어야 하는데, 그 정화제가 다름 아닌 ‘언어’이며 우리 정치에서 가장 결핍된 부분이기도 하다.
 
우리의 정치 언어가 이리도 살벌한 것은 근대 자유민주주의 연륜이 짧은 탓도 있겠지만, 잘못된 정치 시스템에서 연유한다는 지적도 많다. 5년 단임제인 제왕적 대통령제 하에서는 권력의 분점 없이 ‘전부 아니면 전무’(All or Nothing)인 까닭에 필사적으로 언어가 거칠어질 수밖에 없다는 항변이다.
 
대통령이 선택한 “통일은 대박이다.”라는 표현이 흥미로운 이유는 삭막하고 저급한 언어로 가득 찬 우리 정치 풍토에 새로운 ‘언어 정치’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다. 물론 이 표현이 매우 문학적이라거나 우리 정치 언어를 치유할 수 있을 것 같아서가 아니라 ‘언어의 정치적인 힘’을 보여 주는 드문 사례이기 때문이다.
 
“통일은 대박이다.”라는 표현이 대박을 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정치적 국면 전환이다. 지난 한해 박근혜 정부는 국정원 대선 불법 개입이라는 이슈에 발목을 잡혀 있었다. 5년 단임제 하에서 당선 첫해에 국민에게 약속한 대부분의 일을 해야 하는 대통령 입장에서는 뼈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새 프레임이 필요했다.
 
그런데 새해 들어 통일이라는 담론으로 이슈를 선점했다. 국민의 지지도 70%를 넘는다. 더구나 통일이라는 이슈를 늘 자신들의 전유물로만 생각하던 진보진영에게도 허를 찔리는 아픔을 주었다. 통일을 입에 달고 살던 그들이 박 대통령의 통일론을 비판하는 자가당착을 볼 때 그들이 입은 내상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신선했던 것은 언제나 단정하고 정제(精製)된 언어를 구사하던 대통령이 ‘대박’이라는 속된 유행어를 썼다는 점이다. 의도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이 단어의 선택에는 다분히 젊은 층을 의식한 측면이 보인다. 통일에 비교적 무관심하며 반 여당 정서인 젊은 층을 겨냥해 무언의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어쨌든 무리한 밀어붙이기나 정치적 싸움 없이 말 한 마디로 정치적 효과를 거두었다는데 큰 점수를 줄 만하다. 이처럼 정곡을 찌르는 ‘정치 언어’를 잘 개발해 사용하게 되면 정쟁을 완화하고 정책의 동력을 얻는 유효한 수단이 될 수 있다. 나아가 시대정신과 미래 비전을 제시함으로써 오래도록 기억되는 자신의 브랜드로 남을 수도 있다.
 
이런 언어를 구사하기 위해서는 사회에 대한 통찰력과 시대를 읽는 상상력, 그리고 문학적 표현력을 겸비해야 한다. 아울러 유머 감각도 필수적이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정치가는 대부분 이런 정치 언어를 브랜드로 가지고 있다. 링컨, 처칠, 레이건과 같은 정치가에게서 우리는 정치가 재미있고 아름다울 수도 있다는 것을 느낀다.
 
우리 사회는 이미 ‘고령화 저출산’이라는 악순환의 고리에 접어들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선거 운동 시기에 이슈 선점을 위해 복지를 강조한 것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고 있다. 경험 많은 시니어들은 이것이 무리라는 것을 벌써 눈치채고 있다. 박 대통령이 복지에서도 국면전환을 도모하는 ‘마법의 정치 언어’를 개발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