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버스토리

경제민주화와 정의의 문제

홍성표 2014. 2. 5. 13:49

 

 

2012년 대통령 선거 와중에 가장 뜨거운 주제가 ‘경제민주화’라는 이슈였다. 당시 ‘동반성장’이라는 개념과 함께 다소 설익은 경제 논리로 온 나라가 시끄러웠던 기억이 있다. 국내 모 대기업의 회장님께서 “사회주의도 아니고 경제민주화가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다.”는 다소 도발적인 발언도 화제였다.
 
그 후 몇 가지 입법이 진행되기도 했지만, 아직도 그 개념이 모호한 상태에 놓여 있기는 마찬가지가 아닌가 한다. 사실 ‘경제’라는 가치중립적인 용어와 ‘민주화’라는 가치지향적인 용어가 붙어 있으니 어색하고, 또 어느 쪽에 방점을 찍느냐에 따라 개념이 오락가락할 가능성이 많은 것도 어쩔 수 없다.
 
먼저 이성적인 눈으로 바라보면 ‘자유주의 시장경제’ 하에서의 경제는 어떤 굴레도 없어야만 성장하고 잘 굴러간다. 소위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시장이 자율적으로 결정하고 작동할 때 효율이 극대화한다는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사회 내의 모든 경제 외적 장치들은 경제를 제약하는 요인이다.
 
이를테면 정치는 경제를 억압하는 대표적인 매커니즘이다. 본질적으로 대부분의 정치 체제는 국가 내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경제 활동의 결과물에서 일부를 세금이라는 장치로 뜯어내야 정치라는 기제가 돌아가게 되어 있으니 어쩌면 억압은 불가피한 일이다. 문제는 그 제약의 정도가 어떠냐 하는 것일 뿐이다.
 
그 억압의 정도가 가장 가혹한 예로 북한을 들 수 있다. 북한은 아예 시장경제가 작동할 수 없는 체제이므로 극단적인 예로 볼 수 있겠지만,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채택한 우리나라에서도 기업인들이 늘 입만 열면 각종 규제 때문에 못살겠다는 푸념이니 우리 경제도 수많은 제약 속에 놓여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민주화’라는 용어가 붙는 순간 또 다른 제약이 있을 것을 본능적으로 아는 기업인들이 드러내놓고는 못 하나 눈에 보이지 않게 저항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어쩌면 그동안 ‘성장’이라는 신화 속에 안주해 온 우리 경제가 본격적인 ‘분배’의 시대로 접어드는 패러다임의 변화를 시사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처럼 우리 경제에 어쩌면 해가 될 수 있음을 알면서도 많은 국민이 경제민주화라는 논리에 수긍했던 것은 그 바탕에 ‘정의’의 문제가 깔려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경제민주화라는 담론은 단순히 경제 정책에 관한 논의가 아니라 바로 경제 정의에 대한 시대적 요구가 담겨 있다는 말이다.
 
마이클 샌델로부터 불기 시작한 정의에 관한 논의는 우리 사회에 나타나는 여러 현상들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했다. 뭔가 불합리한 것을 느끼면서도 문제의 핵심을 잘 몰랐던 것들이 드러나는 계기가 되었다는 말이다. 무엇보다도 우리 사회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가치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은 큰 소득이었다.
 
경제민주화에 국한해서 정의의 문제를 살펴본다면 샌델 교수가 자주 인용하는 존 롤스의 <정의론>이 도움이 된다. 롤스는 서양의 ‘사회계약론’이라는 전통에 경제학의 ‘게임이론’을 결합해 새로운 정의론을 내놓았다. 그의 정의론은 오늘날 대부분의 정의에 관한 이론의 모태가 될 정도로 고전으로 인정받고 있다.
 
여기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자신이 어떤 사회적 위치로 태어날지 모르는 상태이다. 부잣집 아이로 태어날지,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날지, 어쩌면 몹시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힘겹게 살지도 모른다. 롤스는 이러한 상황을 ‘무지(無知)의 베일’에 가려 있다고 표현한다.
 
이처럼 자신이 어떤 처지에 놓일지 모르는 상태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가장 바람직한 사회의 모습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최고위층으로 태어난다면 별 상관이 없겠지만, 혹시라도 최하층민으로 태어난다면 어떻게 하나? 이런 경우에 대비해서 최하층민도 어느 정도 생활을 보장받을 수 있는 사회구조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롤스의 정의론이 가지는 또 하나의 특징은 이를 게임 이론으로 푸는 것이다. 누군가와 게임을 할 때 보통은 자기에게 가장 이익이 되는 선택을 한다. 하지만 때로는 상대방의 선택에 따라 자신이 최악의 상황을 맞이할 수도 있다. 이 경우 최선의 선택을 하기 보다는 위험을 피하는 차악(次惡)을 선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경제민주화’라는 이슈를 경제 논리로만 보면서 ‘자본주의의 적(敵)’으로 매도할 것이 아니라 그 밑에 깔려 있는 국민들의 정의에 대한 갈망을 읽어내야 한다. 그렇다고 그 정의가 어려운 것도 아니다. 롤스의 정의론의 정신을 한 마디로 쉽게 표현하면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정신이 아닌가.
 
정의의 정신과 논리는 고답적인 이론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생각처럼 매우 단순하다. 여기에 여럿이 나누어 먹어야 하는 케이크가 있다면 어떻게 나누는 것이 정의에 합당할까? 롤스는 이렇게 대답한다. “케이크를 나눌 때, 칼을 잡고 케이크를 자른 사람이 가장 마지막 조각을 가지는 것이 정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