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버스토리

정의는 항상 옳은 것인가?

홍성표 2014. 2. 5. 13:23

 

 

한때 하버드 대학교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강의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대학 내에서는 비교적 인기 높은 강의였지만, 미국이라는 나라 전체의 관심을 끌 정도는 아니었는데, 유독 우리나라에서 높은 인기를 누리고 그의 책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우리가 정의를 그렇게 사랑하는 민족이었던가?
 
물론 우리가 유행에 민감한 연유로, 게다가 하버드대학이라는 명품이기에 열광한 측면도 있었겠지만, 상품의 제목이 ‘정의’가 아니었더라도 그렇게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TV 화면에 몰려들었을까? 인터뷰하던 마이클 샌델 교수가 오히려 의아해 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정의란 도대체 무엇이길래 한국인들의 심금을 울리는가.
 
우선 한국의 현실이 정의에 대한 목마름을 부추겼다고 본다. 하루가 멀다 하고 터지는 고위공직자들의 부정과 검은 돈을 받은 정치가들이 검찰청을 들락거리는 모습에서, 그리고 재벌들의 탈세와 불공정 행위들, 서민들의 고달픈 삶과 좋은 일자리가 갈수록 줄어들어 미래가 불투명한 젊은이들의 불안감이 정의를 찾게 만들었을 것이다.
 
또한, 자존의식이 강한 한민족의 특성과 굴곡진 현대사에서 두 번에 걸친 혁명으로 자유를 쟁취했던 자부심이 국민들을 정의에 민감하게 만든 측면도 있을 것이다. 비겁한 연예인의 병역 기피 같은 작은 일에도 시민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비난하는 것을 보면 국민들의 가슴 속마다 정의라는 용암이 늘 부글부글 끓고 있다는 느낌도 든다.
 
샌델 교수의 강의는 서양 철학사를 관통해온 정의에 관한 논의들이 오늘날의 정치 사회적인 현실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조명하면서 공익적이며 올바른 삶의 가치를 탐색하려는 매우 유익한 것이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내용이지만, 정의를 정치담론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 우리 청중에게 그의 실천적 접근은 다소 미흡했을 수 있다.
 
필자만의 느낌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만큼 정의(正義)에 관한 동서양의 접근이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정의에 관한 논의가 서양에서는 철학이나 시민 사회의 제도적 측면에서 논의되었던데 반해, 동양에서는 정치나 권력이라는 영역의 프레임 속에서 개념이 규정되었으므로 시각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어원을 풀어보면 정(正)이라는 글자는 적군의 근거지(一)를 향해 진격하는 아군의 발걸음(止)을 형상화한 것으로 ‘치다’는 의미다. 전쟁을 일으켜 적군을 정벌하려는 쪽은 정의를 표방하므로 ‘바르다’는 뜻으로 발전했다. 의(義)는 칼과 창 위에 양(羊)이 놓인 제단의 희생물을 뜻한다. 그러니 더욱 살벌하다.
 
정의를 정치 개념으로 확립한 이는 공자다. 노나라 계강자(季康子)가 정치가 무엇인지를 물었을 때 공자는 “정치는 바름입니다.(政者正也)”라고 대답한다. 아마 속으로는 ‘너만 똑바로 하면 돼’ 하는 뜻이었으리라. 그동안 폭력의 논리에 젖어 있던 권력에 윤리라는 강력한 굴레를 씌우는 순간이다.
 
의(義)에 관한 언명은 수천 년 이어온 유학의 성격을 규정할 만큼 의미심장하다. 공자는 ‘군자는 의(義)이 기뻐하고, 소인은 이(利)에 기뻐한다.(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라고 하여 의(義)를 좇지 않는 인간은 형편없는 소인으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조선조 500년 동안 선비들이 왜 그렇게 피를 튀기면서 싸웠는지 짐작이 간다.
 
그러니까 동양에서의 정의란 철저하게 정치의 논리, 권력의 논리였다. 물론 위에서 말한 ‘소인(小人)’도 지배층 가운데 이(利)를 탐하는 무리를 가리키니, 당시 이런 논의에 아예 접근조차 차단되었던 피지배 계층과는 아무 상관없는 그들만의 리그였다. 동양에서의 정의에 관한 담론은 오로지 ‘군자(君子)’들만의 논리였던 셈이다.
 
게다가 글자의 어원이 암시하듯이 정의는 언제나 폭력을 동반할 위험을 안고 있다. 정의를 가진 쪽이 권력을 가진다는 유학의 도그마에 빠지면 정의는 이념화하면서 실제적인 삶의 현장을 떠나 흉포해진다. 조선조의 사화(士禍)나 해방 후 현대사의 비극도 따지고 보면 이런 정의로 포장된 이념이 만들어낸 비극이 아니었던가.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처럼 정의와 명분과 권력이 혼동되어 잘 구별되지 못할 때가 많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모두 성취하고 선진국 문턱에 이른 우리 사회가 아직도 혼란스러운 것은 권력을 쥐는 것이 마치 정의를 세운다는 자기기만에 빠졌거나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정의를 악용하는 행태에 기인한 바 크다.
 
공자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오늘날 주권재민(主權在民)이라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소인(小人) 축에도 끼지 못한 일반 국민들을 위한 정의론은 없는 셈이다. 사업하고 취직하여 열심히 생산 활동에 종사하면서도 이(利)를 탐하면 안 된다는 유교식 정의의 굴레에 묶여 국회의원들의 호통을 감수하는 형편이다.
 
물론 인생을 정의롭게 사는 것이 옳다. 그러나 그 정의는 이념화된 정의가 아닌 개인적인 실천적 삶의 가치여야 한다. 따라서 정의는 서로 강요하고 강요당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정의를 가장한 숱한 정치 구호에서 벗어난 뒤에 비로소 샌델의 사회적 정의를 우리 ‘소인(小人)’들을 위한 정의로 논의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