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에서 중세까지 믿어온, ‘모든 생물은 신이 창조했다’는 도그마를 깨뜨린 ‘진화론’이 발표된 이후로 많은 이론이 보완되고 첨가되었지만, ‘자연선택’과 ‘적자생존’이라는 큰 줄기는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모호한 것은 진화의 방향성이다. 다시 말하면 진화는 분명한데 도대체 어디로 진화하느냐는 것이다.
진화론에 따르면 방향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생존에 유리한 쪽으로 진화해 간다고 한다. 그러나 동물 진화의 꽃인 인간에 이르러 보면 생존에 유리하다는 말도 이해하기 어려워진다. 최소한의 논리라도 있어야 미래를 대비할 텐데, 인간이라는 존재가 하도 복잡하고 미묘해 뭐가 생존에 유리한 것인지조차 알 수 없다는 말이다.
이를 테면 잘 살아가라고 수억 분의 일이라는 경쟁을 뚫고 낳아줬더니 별 같잖은 이유를 대며 자살을 시도하고, 나 살기도 바쁜데 생면부지의 남을 구하려다 자신의 목숨을 바치기도 한다. 진화에 기여하려면 자손을 많이 퍼트려야 하는데 결혼할 생각들을 안 하고 결혼해도 애 낳을 생각을 안 한다.
사정이 이러하니 진화라는 이론이 맞는 것인지 은근히 의심된다는 말이다. 동물계에도 자신의 종족을 위해 몇 개체를 희생시키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으니 타인을 위한 인간의 희생 정도는 이해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지금 인간 세계에 일어나고 있는 혼란이 진화인지 퇴보인지 여전히 알 수 없다.
대중적인 과학 저술가 리처드 도킨스의 주장에 따르면, 한정된 시간을 살아가는 개체들은 개별적인 존재 가치에 별 의미가 없으며 사실상 생물의 주인은 유전자이다. 그러므로 유전자가 영속하는데 유리한 쪽으로 모든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며 인간도 사실은 유전자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과격한 주장을 하기도 한다.
과학자들의 활약으로 유전자의 중요성은 많이 밝혀졌지만, 그것만으로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질을 모두 파악했다고 하기는 어렵다. 도킨스가 신은 없다고 계속 목청을 높여도, 여전히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 ‘지적인 설계자’를 찾아 교회, 성당, 절을 찾는 발길은 멈출 줄을 모른다. 오히려 도킨스의 설교가 갈수록 피로감을 높이고 있다.
만약 유전자가 되었건 신이 되었건 분명한 방향만 확인되면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미래를 설계하고 보람되게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련만 어느 쪽도 분명한 답을 주지는 않는다. 그런데 매우 엉뚱하게도 이런 혼란을 풀 힌트가 현대 물리학에서 발견되었다. 바로 20세기에 등장한 양자역학이다.
사는 것도 골치 아픈데 물리학 얘기로 부담을 드릴 생각은 없다. 사실 나도 잘 모르니까. 하지만 양자역학이 이룬 성과는 물리학뿐 아니라 사회, 경제, 종교, 철학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분야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므로 잠시 경청할 만하다. 핵심은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의 원리’라는 이론이다.
과거에는 빛의 성격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었다. 대부분 빛을 파동이라고 여기고 있었는데, 아인슈타인에 의해 입자일지도 모른다는 가설이 제기되었다. 그 후 하이젠베르그가 등장해 빛의 성질이 때로는 파동이고 때로는 입자이기도 해 관찰할 때마다 달라진다는 상상을 초월하는 주장을 했다.
그런데 이 이론이 실험을 통해 정설로 굳어지면서 물리학에는 지각변동이 일어났고, 그 충격은 여러 분야로 번져나갔다. 말하자면 우리가 생각하듯이 사물은 그 성질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관찰자와의 교감 속에 정체가 규정된다는 말이다. 물리의 세계가 그렇다니 인간도 고정관념으로 바라봐서는 안 되는 존재가 된 것이다.
말이 길어졌지만, 거칠게 요약하면 인간은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뜻이다. 아무리 유전자가 건강한 삶의 방향을 제시해도 담배 피우고 술 마신다는 말이다. 죽는 줄 알면서도 전쟁을 벌이고, 죽음을 무릅쓰고 불 속에 뛰어든다. 씨를 남겨야 하는데 혼자 살다가 죽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여기에 진화의 혼란이 생긴다.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에 그린 <천지창조>를 보면 ‘아담의 창조’라는 부분이 있다. 그런데 예전부터 궁금했던 점은 신과 아담이 손을 내밀고 있는데 그 손끝이 약간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신은 애절한 포즈인데 아담은 약간 건방진 느낌을 주고 있다. 작가의 의도가 들어 있다면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진화는 일방적으로 설계되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개체가 지니고 있는 ‘의지’의 힘에 의해 좌우될 수 있다는 깨달음이다. 타고난 조건이 아무리 빈약하더라도 ‘의지’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고, 조건이 아주 좋아도 자신을 파멸시킬 수 있다. 신은 떨어진 손가락 사이 틈만큼의 ‘자유의지’를 인간에게 허락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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