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도 눈만 뜨면 세상의 갈등과 만난다. 신문을 펼치거나 인터넷을 열면 온 나라가 갈등의 자욱한 먼지로 가득 찬 느낌이다. 한동안 제주 서귀포 해안가에 가득했던 흙먼지가 가라앉나 싶더니 밀양에선 송전탑 문제로 한전과 주민들의 멱살잡이가 한창이다. 중앙 정치도 뒤질세라 국정원 사건을 빌미로 그러지 않아도 궁둥이가 근질근질하던 ‘촛불족’들에게 판을 깔아주느라 야단법석이다.
한 때 유행하던 유머로 뉴질랜드에 이민 간 동포들이 “뉴질랜드는 재미없는 천국이고 한국은 재미있는 지옥이다.”라며 남자들이 무료함을 견디지 못해 다시 한국으로 놀러 온다는 웃지 못 할 이야기가 있었는데 정말 한국은 재미를 위해 이토록 갈등을 양산하는지도 모르겠다. 옛글에 속세를 진세(塵世)라 했는데 아마도 한국 사회의 정신세계를 사진으로 찍어보면 뿌연 황사로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그림이 나올 듯하다.
그렇다면 한국인은 싸움이나 갈등이 선천적으로 체질화된 사람들인가? 자존심이 강하고 정치에 관심이 많은 구석은 있어도 갈등을 좋아한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외환위기 때의 ‘금 모으기 운동’이나 태안 앞바다 오염 사태 때 보여준 국민적 헌신, 어려운 처지에 놓인 동족에 대한 온정과 도움 등을 보면 오히려 정이 많고 어려울 때 마음을 합하는 훌륭한 민족이 아닌가? 그런데 왜 이리도 하루가 멀다 하고 곳곳에서 다투고 갈등하는 소리들이 끊이지 않는 것인가?
옛날 한 교수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한국인은 동물에 비유하면 육식 동물이라기보다는 초식동물에 가깝단다. 초식동물은 평상시엔 조용하고 순하여 다툼이 없지만 싸움이 일어나면 매우 잔인해진다는 것이다. 육식동물은 싸움이 일상화되어 익숙할 뿐 아니라 나름대로 싸움의 질서가 있어 상대를 인정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과열이 되면 멈출 줄을 아는데 초식동물은 경험이 없어 끝장을 본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재미있는 관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수많았던 갈등들을 지나고 생각해 보면 부질없고 그때 왜 핏대를 올리며 싸웠는지 어이없다는 느낌도 든다. 명백하게 정치적인 의도가 깔린 조작된 갈등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갈등은 갈등을 다루는데 서투르기 때문에 발생하거나 증폭되어 갔던 게 아닌가 싶다. 인간이 사는 곳이면 갈등이 없을 수 없는데 문제는 그러한 갈등을 조정하는 문화나 사회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사실 잘만 이용하면 갈등은 사회 발전의 동력이 될 수 있는데도 말이다.
최철규 휴먼솔루션그룹 대표는 “갈등을 풀고 싶다면 상대의 ‘요구’보다 ‘욕구’에 집중하라”고 충고한다. 예를 들어 2014년 완공을 목표로 공사 중인 울산~포항 고속도로는 2년 전 강한 반대에 부닥쳤다. 고속도로 옆에 있는 아파트 주민들이 아파트 옆을 통과하는 451m 구간을 방음 터널로 시공해 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하지만 시공사는 소음 수준이 환경 기준치에 적합하다며 방음 터널을 지을 수 없다고 맞섰다.
이처럼 각자의 요구(position)가 다를 때는 요구 자체가 아니라 그걸 만들어낸 밑바탕에 있는 ‘욕구(need)'에 주목해야 한다. 아파트 주민의 욕구는 무엇일까? 소음 때문에 집값이 떨어지는 게 싫다는 것이다. 시공사는 예산의 차질 없이 공사를 마무리하고 싶다. 이를 파악하면 갈등의 핵심이었던 방음 터널은 더 이상 중요치 않다. 어떻게 적은 비용으로 소음과 집값 하락을 막느냐 하는 과제가 남을 뿐이다. 고민 끝에 이들은 컴컴한 방음 터널 대신 화사한 아치형 방음벽을 설치하고 방음 수목림을 조성해 더 좋은 주거 환경을 만들어 냈다.
세계 최대 수력발전 댐인 중국 싼샤 댐은 유역의 크기가 서울시의 두 배에 이른다. 그런데도 싼샤 댐은 완벽히 설계됐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물론 중국의 공산주의 체제 덕을 본 점도 있겠지만, 설계 책임자는 가장 큰 공헌자로 댐 건설 반대론자들을 꼽았다. 반대 의견을 잠재우기 위해 온갖 아이디어를 짜내다 보니 완벽한 설계가 가능했다는 얘기다.
‘갈등 없는 삶을 살고 싶다’고 말하지 말자. 갈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갈등에 대처하는 나의 태도가 중요하다. 갈등이 독(毒)이 될지 득(得)이 될지 선택하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이다. 예수는 당시 벌레 취급을 받던 세리나 창녀들과도 거리낌 없이 만나며 ‘자신에게는 공정의 잣대를, 타인에게는 관용의 잣대를’ 들이대라고 설파했다. 갈등은 잘하면 멋진 삶의 훌륭한 도우미가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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