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이건 예술이건 세상의 모든 일이 궁극적인 경지에 다다르면 어린 아이와 같이 순수해진다. 말년의 추사체가 보여주는 천진난만한 고졸미(古拙美)를 바라보면 모든 제약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예술의 본질이 느껴진다. 아인슈타인의 장난기 어린 표정에서 그 복잡해 보이는 과학도 알고 보면 단순한 직관에서 멀지 않음을 깨닫는다. 음식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한다.
한식은 재료 본래의 맛을 잘 살리는 요리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맛과 향이 강하면 안 되는데 요즘 식당의 음식들이 젊은이 입맛에 맞춘다는 핑계로 경쟁적으로 짜고 달게 변하는 현상은 매우 안타깝다. 우리나라에서 비교적 순수한 맛을 보존하고 있는 곳은 강원도 지역이 아닐까? 오직 들기름 하나만으로 만들어 내는 산나물이나 소금만 넣은 명태해장국은 역시 맛의 본질에 가깝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복잡한 요리 과정을 거쳐 가면서 궁극의 순수한 맛을 찾으려는 노력은 평양냉면을 따를 것이 없다. 우선 조리과정이 매우 길다. 깊고 순수한 육수의 맛을 내려면 하루 전부터 고기를 삶는 긴 산고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면발의 탄력을 적절하게 조절하려면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 한다. 그러면서도 맛은 자극을 최소화하기 위해 재료 자신을 죽여야 한다. 최고의 숙수가 무념의 경지에서 만들어 내는 것이 바로 평양냉면이다.
필자는 선친의 고향이 평안북도 정주라서 그런지 어려서부터 평양냉면과 친숙하게 지냈다. 평양냉면의 원류는 매우 소박했다 한다. 남쪽에서 일상으로 국수를 먹듯이 북에서도 그저 ‘국수’라고 불리며 늘상 먹는 음식이었다. 다만 밀이 귀해 메밀로 빚었으며 겨울이 긴 탓에 움막에는 늘 동치미가 있으니 그 국물에 말아 먹으면 되었다. 대체로 고기를 먹은 후 입가심으로 먹곤 했다.
그 후 비교적 여유 있는 집에서 꿩 사냥을 하여 꿩고기를 삶아 동치미 국물에 넣어 먹으면서 소위 육수라는 것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사실 냉면은 동치미가 있는 계절인 겨울 음식이었다. 사변 이후 남쪽으로 내려온 평안도 사람들이 생계를 위해 평양냉면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겨울이 짧아 동치미가 귀할 뿐 아니라 사철 영업을 해야 하니 고기 육수로 바뀌었다. 또한, 시원하게 먹으니 여름 음식으로 제격이라 어느덧 여름에 먹는 ‘냉면’이 되고 만 것이다.
한동안은 평양냉면의 수난시대가 이어졌다. 남쪽 사람들의 입맛에 맞추느라 맛이 갈수록 강해졌던 것이다. 함흥냉면과 잘 구별을 못하다보니 냉면을 시뻘겋게 먹는 해프닝도 생겨났다. 사실 평양냉면과 함흥냉면은 비슷해 보여도 전혀 다른 음식이다. 재료도 다르고 만드는 방법도 다르다. 전문성을 중시한다면 한 식당에서 두 가지를 같이 취급하는 것도 지양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평양냉면의 순수성이 갈수록 사라져가는 것이 아쉬웠던 시절이었다.
필자는 평양냉면 본래의 맛을 찾기 위한 노력으로, 유명하다는 집은 거의 다 가보았다. 초기의 장충동 평양면옥은 본래의 맛을 가장 잘 간직한 집이었다. 부친이 의정부에서 평양면옥을 개업했는데 그 집의 두 딸이 장충동과 을지로에서 개업하여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 그래서 을지면옥도 맛이 비슷하다. 그러나 요즘은 가격이 너무 오르고 맛도 조금씩 강해지고 있다.
육수의 맛이 순하기로는 마포에 있는 을밀대가 있다. 그런데 창업주인 부친이 돌아간 후 면발이 조금 질겨지고 육수 맛도 짙어지고 있다. 우래옥이나 남포면옥은 너무 대중화되어 맛의 차이가 없어지고 조미료 맛이 짙어져 아쉽다. 요즘에 즐겨 가는 곳은 중구 백병원 옆에 있는 평래옥이다. 옛날 점포 자리에 산뜻하게 신축하여 단정해졌지만 맛은 그대로이다. 가격도 비교적 저렴하고 냉면 하나를 시켜도 맛깔난 닭고기무침을 듬뿍 줘 소주 안주로 제격이다. 이북 출신 노인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냉면을 먹으러 갈 때마다 아이들을 데리고 다녔는데 그 한없는 심심한 맛에 적응을 못하던 아이들이 성인이 된 지금은 저들이 먼저 가자고 재촉한다. 종업원이 모르고 가위를 가져오면 “저희는 필요 없습니다.”라고 마니아처럼 말한다. 젊은이가 입맛이 변한 것이 아니라 맛의 심오한 본질을 맛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유의 맛을 지키는 얼마 남지 않은 평양냉면의 숙수들이여 제발 그 맛을 지켜주시라!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변치 않는 것은 있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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